Essay
당신만이
폴 토마스 앤더슨 (이하 PTA ) 감독의 《One Battle After Another》 (2025) 는 작년에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입니다. 영화가 품고 있는 현 시대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 때문인지, 올해 오스카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포함해 여섯 개의 상을 가져갔습니다. 수상 소감에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이 영화를 내 아이들을 위해 썼다"고 말하며,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긴 엉망진창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상식과 품위(common sense and decency)"를 되돌려놓는 세대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직접적으로 현 정권을 겨냥하진 않았지만, 그 절제된 언어 속 뉘앙스는 그 자리에 있던, 그리고 지켜보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영화 속에는 여러 무리가 등장합니다. 불법 이민자들, 그들을 통제하는 막강한 군 세력, 그들에게 저항하며 이민자들을 돕는 혁명 세력(프렌치 75),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시하는 최상위 기득권 세력. 감독은 이 구도 속에서 저항의 불꽃이 다음 세대인 윌라에게로 전해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영화의 제목 자체가 그 메시지입니다. 싸움은 계속됩니다.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가 이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PTA 감독 역시 영화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하며, 그 전제 조건으로 기존 권력의 제거를 놓습니다. 영화 속 '크리스마스 어드벤처러스 클럽'은 타도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 서사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 세력이 새로운 기득권이 됩니다. 권력의 주체만 바뀔 뿐, 구조는 재생산됩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저항은 일차원적이며 무책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또 다른 전투'가 결국 같은 순환의 반복이라면, 우리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역사학자 피터 터친은 이것을 데이터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는 통합과 분열의 주기를 반복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과잉 생산되고 내부 경쟁이 격화되면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결국 혁명이나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같은 구조가 다시 시작됩니다. 주체만 바뀐 채로. 발라지 스리니바산은 《The Network State》에서 이 순환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술 기반의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 새로운 권력 구조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기존 프레임 바깥에서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 참고가 된 책들이지만, 해답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역사학자 피터 터친은 이것을 데이터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는 통합과 분열의 주기를 반복합니다. 기득권 세력이 과잉 생산되고 내부 경쟁이 격화되면 사회는 불안정해지고, 결국 혁명이나 붕괴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같은 구조가 다시 시작됩니다. 주체만 바뀐 채로. 발라지 스리니바산은 《The Network State》에서 이 순환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술 기반의 새로운 공동체를 제안하지만, 그것 역시 결국 새로운 권력 구조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기존 프레임 바깥에서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 참고가 된 책들이지만, 해답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PTA 감독은 결국 "싸워라, 저항해라"라고 말합니다. 문제를 진단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해법이 결국 똑같은 순환의 입구로 다시 데려다 놓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히든,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붙들고 굳건히 버티는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츨라프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체제 아래에서 "진실 속에서 살기(living in truth)"를 말했습니다. 거리에 나가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세계를 진실 위에 세우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저항이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적 신념이라는 내면의 토대 위에서 나치에 맞섰습니다. 이들에게 단단한 '나'는 체제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가장 지속 가능한 저항의 형태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권력을 차지한 뒤 같은 구조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순환의 덫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저항은 애초에 권력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뒤집히든,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붙들고 굳건히 버티는 사람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갑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츨라프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 체제 아래에서 "진실 속에서 살기(living in truth)"를 말했습니다. 거리에 나가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것만이 저항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세계를 진실 위에 세우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형태의 저항이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적 신념이라는 내면의 토대 위에서 나치에 맞섰습니다. 이들에게 단단한 '나'는 체제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가장 지속 가능한 저항의 형태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권력을 차지한 뒤 같은 구조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순환의 덫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저항은 애초에 권력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One Battle After Another》가 말하는 저항은 밖을 향합니다. 적을 몰아내고, 세계를 바꾸고, 다음 전투로 나아갑니다. 저는 밖이 아닌, 안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세계를 먼저 세우는 것. 그것이 세워져 있을 때, 밖을 향한 싸움도 순환의 덫에 빠지지 않습니다. 전투는 계속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 끝이 나야만 합니다. 그것을 끝낼 수 있는 건 내가 뽑은 대통령도, 영화 속 혁명가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