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넌 그거, 참 좋아했잖아.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확실한 게 거의 없는데도 젊은이는 제한된 선택지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는 채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가능성이 오히려 판단을 어렵게 하는데, 이렇게 내려진 결정들이 모여 확실성만 남아 있는, 더는 아무것도 바꿀 게 없는 미래가 된다. 청춘의 불안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중에서
불안의 본질
불안은 '선택' 앞에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단 한 번의 선택이 되돌릴 수 없는 내 삶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불안을 넘어 두려움을 만들었습니다. 그 불안의 본질은 결국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내리는 이 결정 하나가, 바꿀 수 없는 내 인생이 되면 어쩌지?'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자리했던 불안은 단연 '일'에 대한 결정의 순간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청년기 내내 나를 따라다녔고, 어쩌면 지금도 완전한 답을 찾지 못한,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일'은 언제나 나에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깊고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나는 늘 '일'이라는 범위 안에서 찾고 싶어 했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몰입하게 하고 무의미함 속에서도 견디게 만든 것은 '일'이라는 이름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 그 자체의 에너지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은 언제나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평안하고 설레게 만드는 모순적인 감정의 중심이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
40대가 된 지금도 20대 때와 다르지 않게, 나는 여전히 '일' 앞에서 고민하고 불안을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 달라진 점이 생겼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통해 내가 선택해온 결정들이 제법 쌓였고, 그것들을 통해 나에게도 분명해진 것들이 생겼습니다. 누군가는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어떤 일을 선택해야 할까 하는 결정 앞에서, 이제는 불안을 줄여줄 수 있는 몇 가지 기준과 도구가 나에게도 생겼으니까요.
선택을 도와주는 도구, 기록
불안에 휩싸일 때마다 나는 기록을 했습니다. 복잡한 생각을 꺼내어 적고, 흩어진 마음을 모아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기록은 내 삶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찾고자 하는 답이 외부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먼저 내가 원하는 일의 조건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도적으로 하게 되는 일. 누구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일. 매일 아침, 나의 존재 이유를 일깨워 주는 일.
이 조건들을 토대로 구체적인 일의 모습을 찾기 위해, 먼저 나의 과거를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보았습니다. 과거에 어떤 일들을 좋아했고 싫어했는지를 생각해보며, 내 행동들과 감정들, 사소한 기억들 하나하나가 그 실마리를 쥐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말없이 무언가에 몰입했던 날들, 그땐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기획하고 창조했던 날들. 그 기억들을 최대한 떠올려보려 했습니다. 특히 '일'과 관련된 기억들 — 아르바이트, 하기 싫었던 일, 몰입했던 일,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즐거웠던 일들 — 그 모든 장면을 기억나는 대로 구체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기록 속에서 인사이트를 추출하는 질문들
기록들에는 어떤 공통된 패턴이 있을까요? 계속 반복되고 있었던 생각이나 행동은 무엇인가요? 내 행동들 뒤에 숨어 있는 감정과 욕구는 무엇일까요? 일들을 시작하게 된 의도와 계기가 겹치는 게 있나요? 그만둔 일들에는 무슨 이유가 있었나요? 몰입했던 일은 왜 그랬을까요?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Scale AI의 알렉산더 왕은 채용 인터뷰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 꼭 묻는 질문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장 몰입했던 순간, 주도적으로 일했던 순간, 의욕이 없었던 순간, 그리고 스스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묻습니다.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이런 질문들은 나를 이해하고 더 깊이 알아가는 데 가장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일에 절실한지, 무엇에 열정을 느끼는지 알고 싶다면, 과거의 나를 천천히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보세요.
과거 속에 특별한 성과나 큰 의미가 없어 보여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작지만 나의 기쁨과 몰입, 그리고 진심이 담겼던 기억이라면 '일'을 탐색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과거의 일들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나 인사이트가 될 만한 요소들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어느새 하나의 의미 있는 흐름을 만들었고, 추출된 인사이트들을 몇 줄의 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 만들기를 좋아함
- 친구 삼행시 짓기
- 카페 브랜드 만들기
- 프로젝트 기획 같은 활동에 큰 즐거움을 느낌
-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 글과 그림으로 내 마음과 생각을 표현
- 밤새 작업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몰입의 순간들을 그리워함
-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도적으로 행동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려 했던 경험들
- 내 작업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던 중, 뜻밖에도 내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쉬는 시간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우리 반 친구들은 각자 빈 종이 한 장씩을 들고 내 책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고, 이름과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단 몇 초 만에 각자의 이미지에 맞는 삼행시를 짓고 간단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게 생각보다 기발하고 재밌었는지,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내 자리 앞에 줄을 서곤 했다. 심지어 말 한마디 없던 친구들까지 찾아왔을 때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꽤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노트에 이 기억을 기록하는 순간,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넌 그거, 참 좋아했잖아.' '넌 그거, 꽤 잘했잖아.'
틱 장애를 가진 어느 고등학생
내게 고교 3년이라는 시간은 극도의 불안, 우울, 자존감 상실로 기억됩니다. 그 불안은 결국 신체적인 이상으로도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나는 어려서, 둔해서 내 상태를 들여다볼 여유도, 이유도 몰랐습니다. 늘 그곳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움츠러 있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견디며 버티던 어린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마주한 그 시절의 나는, 단 몇 분의 행복했던 그 '쉬는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자유롭게 나를 표현했고, 친구들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 안에 나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흩어져 있던 나를 차분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그때는 실패처럼 느껴졌던 선택들도 지금의 나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됩니다. 불안했던 이유, 자주 반복되던 행동, 괜히 끌렸던 일들까지 — 돌아보고 나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더 분명하게 만들어줍니다.
지금 나는, 조금은 더 선명해진 그 '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일은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젠 평안함도 줍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 일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일깨워줍니다. 오랫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던, 그 불안의 그림자에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입니다.